평소 자기계발서를 자주 읽는 편인데, 솔직히 읽을 때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공감이 가고 쓰여진 대로 실천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그런 다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늘 제목만 다른 자기계발서를 계속해서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책들이 말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한가지 뿐인데 말이다. 무엇이든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고, 변화는 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책들의 내용의 근본은 다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이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역대 동서양의 다양한 48명의 철학자를 소개하면서 그들의 철학적 화두를 작가 자신의 경험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48명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모두 깊이 있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철학에 대해 아직까지 생소한 나로서는 가벼운(?) 맛보기 정도로 나름 읽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왠만한 자기계발서보다 앞으로 이 책에 소개된 철학자들의 저서를 더 깊이 있게 찾아보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Encheiridion』
에픽테토스의 신이 종교적이라서 불편하다면, 작가를 사회나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타인들로 바꾸어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사회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특정한 사회 속에 던져져 살아가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이다. 이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배역을 맡도록 강제한다. 결혼해서 시부모를 만났을 때, 젋은 신부는 시부모와의 관계에 어울리는 페르소나를 써야만 한다. 또한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신입 사원은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어울리는 페르소나를 써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은 평생 가면을 쓰고서는 살 수가 없다. 외롭기 때문이다. 자신의 맨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불가피하게 쓰고 있는 페르소나만을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페르소나가 자신의 맨얼굴이라고 믿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럴 경우 맨얼굴은 페르소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쭈글쭈글 망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p. 035 ~ 037
※ 페르소나(persona) = 가면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분명히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전범이다. 그렇지만 아이히만 자신은 단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히만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아렌트가 직면한 문제였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전한 무사유 2'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
우리가 아이히만처럼 무사유의 상태에 빠져있다면,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로 인한 악은 도처에서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 '악의 평범성 3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은 근면과 성실이란 미명 아래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p. 154 ~ 156
- 자크 데리다 『주어진 시간 Donner le temps』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선물을 주고서 주었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데리다는 그런 식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우리의 의지만이 선물을 선물로서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p.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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