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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Life/Book

사과는 잘해요 / 이기호

by 타비몽 2012. 1. 24.

<갈팔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라는 이기호의 단편모음집을 읽고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냉혹한 현실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재치있고 유머있게 표현한 그의 문체가 좋았다. 이 책도 그런 기대감으로 읽었다. 하지만 단편집에서 보였던 그의 재치넘치는 글은 볼 수 없었고, 좀 더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면서 시봉과 나를 통해 진짜 "죄"가 무엇인지, 진짜 "사과"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시설에서 소위 반장으로 있으면서 대신 복지사에게 죄를 고하고 처벌을 받아오던 시봉과 내가 시설 밖에서 일부러 죄를 만들어 사과를 대신 하게끔 하는 부분은 정말 섬뜩하다. 없는 죄가 죄가 될 수 있다는 게.... 계속 죄라고 각인시키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지르게 된다는 게 ... 꼭 악마의 유혹같다.  그리고 의뢰받은  "사과"는 반드시 실천해내고야 마는, 그러다 "사과"의 명목하에 살인까지 하는 장면에서 시봉과 나의 순진무구함이, 그들의 맹목적인 "사과"에 대한 집착이 안타깝고 섬뜩하기만 하다.  단편집에 보았던 이기호의 재치있는 문체는 볼 수 없었지만, 이기호 특유의 아이러니(?)함은 이야기 곳곳의 상황에 그대로 녹아있는 듯 하다.

"나"가 감옥에 갇힌 시설 원장을 찾아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원장의 마지막 말이 머리속을 꿰뚫듯 스쳐지나간다.

"만약 내가 네 아버지였다면 말이다.... 그랬다면, 아마 시설에 찾아와 아들과 함께 살게 해달라는, 그런 바보 같은 부탁은 안 했을거야.
... 중략..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

원장의 이 말과 마지막 장면 "나"가 시봉의 여동생을 업고 병원을 도망나오면서 집으로 가는 장면이 오묘하게 겹쳐지는 건 왜일까?

'멀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병원의 십자가는 높은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라는 부분에서 "나"가 시봉에서 죄를 짓고 시봉이 저 대신 사과를 받으라는 말에 자신이 사과를 받았지만, 결국 스스로 죄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잊고 싶어 모른척 하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 밑줄긋기 ::

"도대체 내가 형님한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사과를 하라는거야? 응? 어디 말이나 한번 들어보자."
그러면 시봉과 나는 차례차례 돌아가면서 얘기해주었다.
"아까 배드민턴공을 높이 띄운 것도 죄가 될 수 있고요."
"도시락 반찬을 두 번 더 집어 먹은 것도 죄가 될 수 있지요."
"파라솔 의자에 먼저 앉은 것도 죄가 될 수 있고요."
"캔맥주를 더 빨리 마신 것도 죄가 될 수 있어요."
"죄는요, 사실 아저씨하곤 아무 상관없는 거거든요."
"아저씨가 생각하는 거, 모두가 다 죄가 될 수 있어요."
"그걸 우리가 아저씨 대신 사과해드린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아저씬 좀 쑥스러울 테니깐요."

p. 67 ~ 68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밥을 먹었다. 키가 큰 복지사가 말한 10분은 이미 다 지나가버렸다. 그래도 나는 계속 밥을 먹었다. 그러면서 나는, 예전 시봉과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때 시봉과 나는 이런 말들을 주고받았다.
"나중에 혹시 나한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말야."
"그러면?"
"그냥 너한테 해."
"나한테? 너한테 할 사과를?"
"응."
"왜?"
"뭐, 내 대신 네가 받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계속 시봉에게 죄를 짓고 싶어졌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순 없었으나, 나는 시봉에게 꼭 죄를 지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시봉에게 죄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p.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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