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2011.12.31
고전을 현대적인 시각에서 날카롭게 비틀고 분석한다.
작가는 "심청전"에서는 심청이의 죽음을 공동체적 타살로, "장끼전"에서는 무능한 가장으로 인한 비극적 가정사를, "토끼전"에서는 어리석은 고위관료들과 세속적이고 물질만능주의에 물든 이에 대한 비판,"춘향전"에서는 이도령이 정녕 춘향이를 사랑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색다른 관점에서 다시 읽는 고전도 색다른 재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__밑줄긋기
<장끼전>
눈 덮힌 허허벌판을 헤매는 장끼네 가족은 바로 조선 후기 유랑민의 모습이었다. 그네들은 먹고살 토지가 없었고, 그러한 경제적인 궁핍은 가장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구복(口腹)이 원수'라는 까투리의 말을 허투로 들을 게 아니라, 생존의 문제 앞에서 가장은 앞뒤 분간 못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불쌍함의 실체란 단지 죽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장끼는 자신을 말리는 까투리에게 욕을 하고, 발길질을 하며 난폭함을 보인다. 이러한 폭언과 폭력은 장끼 자신의 인격이 덜되어서라기보다는 여성에 대해, 가족에 대해, 또는 삶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도 합리적인 고민의 기회를 갖지 못한 사회 밑바닥 인생들의 공통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장끼네 가족의 두 번째 비극은 무능한 가장을 불쌍한 가장으로 만들고야 마는 비극적인 세상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점이다.
p.90
<홍길동전>
'최초의 국문소설'이자 '적서 차별 타파'를 부르짖은 개혁 소설이었던 <홍길동전>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고작 그 주입된 기억밖에 없는 듯하다. 우리는 그런 지식들을 외워왔고, 그래서 <홍길동전>은 교과서에 남았다. 그러나 지방대 차별, 여성 차별, 외모 차별이 근사하게 우리 사회에 파고든 오늘날, 바로 그런 '유리 천장'에 대한 담론 투쟁의 보고서로서 <홍길동전>은 잊히고 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를 차별하는 제도가 아니라 그것을 내면화한 우리 자신이고 어쩌면 거기에 협잡하여 나만의 이익을 차리려는 영악함일지도 모른다. 이런 속 깊은 자기 발전 계획을 홍길동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강고한 문학사적 지식은 그런 의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심이 진실을 찾는 법이다. 그 진실이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그 진실이 문학사의 것이든, 우리의 인생에 대한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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